김정은, 정신 이상해지지 않고서야 대남 전쟁 못해

통일을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연구하고 또 일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어떤 통일을 꿈꾸고 있을까요? 전문가와 함께 통일 한반도를 그려보는 ‘통일 대담’ 시간입니다. 

어제 6.25전쟁 발발 65주년을 맞았는데요, 북한은 지금까지도 6.25는 남조선과 미제가 먼저 침략한 북침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6일 오늘 통일대담 시간에는 6.25전쟁의 진실에 대해서 다시 짚어보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한 이후에도 한국에 대한 무력도발 위협을 계속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의 최근 행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자리에 신인균 자주국방 네트워크 대표 나오셨습니다.

1. 전면전쟁은 총력전이기 때문에 국민 전체가 준비를 해야 합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 사회의 실정이 어땠습니까?

남한은 이승만 대통령만 전쟁을 하자고 주장을 했지 국가 차원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1948년도까지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48년 8월 15일에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8년도에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국군 제14 연대가 여수, 순천에서 반란 사건을 일으키는 등 좌우 이념대립이 굉장히 극심했고 그때 박헌영의 남로당도 활동을 했습니다. 49년도에는 민족지도자였던 김구 선생이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도에 들어서도 5월 1일 노동절, 5월 30일에 국회의원 선거를 했는데, 이 시즌쯤에 북한이 지속적으로 무력 도발을 했고, 그로 인해 우리 군이 굉장히 오랫동안 비상 근무를 하던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여 있었지 전쟁을 준비하는 시기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1. 북한의 경우 소련 군정이 빠르게 장악하면서 안정이 됐는데 남한의 경우는 내부 분열을 수습하려고 전쟁 준비는 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네. 미 군정이 너무 안일하게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기고, 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2.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3.8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있었고, 북한군의 특이 동향도 포착이 됐을 텐데, 한국은 왜 남침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하지 못한 걸까요?

총 874회 정도의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모두 총격전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충돌은 많았습니다. 그리고 5월 1일 노동절, 5월 30일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당시 계속 된 북한의 평화공세 등으로 인해 우리 군이 비상 근무를 하다가 후에는 무뎌진 것입니다. 북한의 도발에 무덤덤해 진 것이죠. 물론 북한의 부대들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는 있었지만 그것이 곧 전면적인 남침이라고 판단하지는 못했던, 정보 판단의 실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6월 23일 밤 12시, 비상경계를 해제하고 병력의 1/3을 외출, 외박을 보냈습니다. 그러고는 현재 서울 용산에 있는 육군회관에 있는 장교 회관에서 댄스파티를 하던 중, 새벽 4시 북한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한 것이죠.

3. 6.25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대표께서는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첫째는 김일성도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통일이 명분이죠. 둘째는, 이것이 핵심적인 것인데, 당시는 전 세계가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와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념체제로 양분이 되어서 서로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굉장히 경쟁을 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공산주의 국가들은 공산혁명을 통해서 공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인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그것을 방어하는데 급급했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또 지원을 받았던 김일성이 공산 세력의 확장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며, 그것이 실질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남조선로동당, 남로당의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전쟁이 벌어지면 남로당 세력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자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헌영의 주장이 김일성의 남침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시나요?

김일성의 남침 주장뿐 아니라 스탈린이 남침을 허락하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죠. 1949년도부터 김일성이 남침을 주장하면서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으러 계속 갔었는데 스탈린이 허락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미 국방부장관인 애치슨이 한국을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에서 빼버리고,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이와 더불어서 여순반란사건, 제주 4.3사건 그리고 지리산의 각종 무장공비 등 남한사회에서의 좌익세력의 활동들을 실제로 보고 받고 목격한 결과, 박헌영의 말대로 전 전선에서 치고 내려가면 후방에서 좌익 세력이 봉기를 해서 저절로 국군은 무너질 것이라는 박헌영의 보고가 스탈린이 듣기에도 타당해 보였던 것이죠. 그래서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허락한 것입니다.

5. 전쟁 초기에 북한군은 빠르게 3.8선 이남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기습공격이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초기에는 국군이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당시 남북한 군의 전력 차이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우리 한국군이 총 10만 5700명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해군, 공군도 일부 몇 천명씩 있었지만 사실은 큰 의미 없는 전력이었고, 육군이 8개 사단이 있었는데 그 8개 사단이 이를 테면 3.8선에 골고루 포진해 있으면 북한이 전면전 남침을 하더라도 막을 순 있었겠죠. 하지만 그 때 당시 국군은 전쟁을 하겠다는 생각 보다는 치안유지에 급급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았고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하고 지방에서 각종 무장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군 사단을 하나하나를 지방으로 보내서 도별로 하나씩 배치를 해놓고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전방 지역에는 사단이 몇 개 없었습니다.

반면에 북한은 19만 8000명의 총 병력이 있었는데, 이를 우리 정보당국 몰래 거의 대부분을 전방으로 집결시킨 것이죠. 우리는 10만명 밖에 안 되는 병력이 전국으로 흩어져 있고 북한은 20만명이 전방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전차도 하나도 없는 상황에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T-34 탱크가 240대가 넘게 있었고, 곡사포 같은 경우도 우리는 91문 밖에 없었지만 북한은 552문이나 있었습니다. 이처럼 북한의 화력이 압도적이었고 공군만 하더라도 우리는 장군들의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던 연락기가 10대 밖에 없었는데 북한은 전투기가 200대가 넘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이 전면전 남침을 하면서 당시 비행장이었던 지금의 여의도를 먼저 폭격을 하여 우리 공군의 발을 묶은 후 전면전 남침을 하였습니다. 전력을 단순 비교만 하여도 2대 1인 상황에서 우리 군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남침에 대응을 할 수 없었고, 그 결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게 된 것이죠.

5-1. 전쟁 초기, 북의 남침을 저지 할 만한 무기는 없던 것입니까?

우리는 대전차 화기도 거의 없었고 91문의 곡사포만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곡사로 쏴야 할 것을 직사로 쐈기 때문에 탱크 파괴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육탄 용사’라고 해서 화염병을 만들어 직접 탱크 위로 올라가 해치를 열고 투척하여 폭파하는 식의 처절한 사투도 있었습니다.

6. 6.25 전쟁은 남북한 만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소련과 중국이 개입했고, 미국을 필두로 한 국제연합군이 참전을 했습니다. 이들 나라들이 참전하면서 전쟁 양상은 어떻게 바뀌게 됐습니까?

대구, 부산만 남겨두고 함락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의 한강 방어선이 무너진 이후로 우리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한 상황에서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UN군은 미국, 영국, 뉴질랜드, 프랑스, 남아공, 콜롬비아 등16개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이 참전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치기 시작했고, 미군의 개입 즉시, 북한의 모든 비행장과 전투기가 무력화되어 제공권이 장악당하면서 보급로가 끊어졌습니다. 당시 마산까지 전진했던 인민군은 보급로가 끊어지면서 소총, 포탄, 식량 등을 보급받지 못하게 되면서 군 전력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급속하게 약화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입니다.

7.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6.25 전쟁 판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상륙작전 이전에 북한군의 보급로가 길어지고 UN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전진해 있던 북한군에 대한 후속군수지원이 힘들어짐에 따라 전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보급로가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이전, 서울의 홍릉 부근에 T-34전차 세 대의 출현으로 지역을 방어하던 우리 군이 공황 상태가 되어 도망간 것처럼 북한 역시 낙동강 방어선 지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10만 명의 UN군이 인천을 거쳐 서울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민군 도망을 갔습니다. 이후 9월 27일 서울을 수복하고 불과 며칠만인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고 10월 중순 평양까지 전진한 것입니다.

8. 전쟁피해 규모도 엄청났을 텐데요, 남북한의 피해 규모가 어는 정도인가요?

한국군과 UN군을 포함 총 18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군인의 사상자는 총 98만 8000명이고 우리 국민의 경우 사상자가 99만 1000명도 됩니다. 북한의 경우는 피해가 더 큽니다. 북한군의 경우 52만명이 전사, 중공군의 경우 참전한 100만명중 90만명 정도가 전사했고, 북한군의 부상자는 40만 6000명 입니다. 양측 모두 30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북한 국민 1200만명 중 300만 명이 휴전 과정에서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과 압제를 비판하며 월남했습니다.

9.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전력 면에서 보면 남한이 북한에 뒤졌습니다. 현재는 어떻습니까?

한국군이 처음에는 미군이 무료 또는 저렴하게 제공하는 무기들을 사용하다가 1980년대부터 우리가 본격적으로 구입하거나 자체 개발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87년도에 K-1전차, 이른바 88전차를 처음 만들었고 1990년대에 들어와서 K-55자주포를 독자적으로 만들기 시작하여 2000년대에 들어와서 K-9자주포를 만들었습니다. 해군의 경우 1980년도에 ‘광개토대왕함’이라는 구축함을 만들기 시작했고, 공군은 1990년대부터 F-16 전투기를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군 전력이 급속히 현대화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반에 들어와서 우리 전차, 자주포, 장갑차, 탱크, 전투기, 군함, 이 모든 것이 북한의 재래식 전력을 앞서기 시작했다고 판단됩니다. 현재 핵이나 생화학 무기 등을 제외하고 정정당당하게 무력 대 무력으로 비교한다면 한국군이 우세하다고 보여집니다.

10. 최근 북한은 이른바 비대칭전력을 통해서 남한을 도발하고 있는데요. 이에 대한 우리의 대비 태세는 어떤 게 있나요?

현재 비대칭전력의 최고 전력이 바로 핵무기인데요 1발에 60만명 정도 사망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미리 파괴해야 하는데요 그것을 바로 ‘킬체인’이라고 합니다. 현재 킬체인 전력을 계속 만들고 있고 내년에도 북한 핵 대응 전력을 1조 5000억 정도 추가 예산편성을 하고 있습니다. 또 킬체인으로 북 핵무기를 방어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미사일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고, ‘참수 작전’을 통한 응징, 보복을 위한 전력을 준비하고 있지만 핵이라는 것이 절대 무기이기 때문에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11. 북한이 최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실험을 하면서 발사 수단을 다양화 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한국의 방어수단이 충분하다고 보십니까?

충분하지 않습니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은 기존에 한국이 만들고 있는 미사일방어시스템(MD), 이는 PAC-3와 논란이 되고 있는 ‘사드’ 등으로 구성이 되는데, 이것으로는 SLBM을 막을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 군에서 이를 방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데 제가 봤을 때 우리 군의 이지스 함의 SM-3 미사일이 SLBM을 방어하기 위한 최적화된 무기체계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있는, 이를테면 북한의 마양도 기지 앞에 한국의 잠수함이 매복해 있다가 SLBM을 장착한 잠수함이 출현하면 바다 속에서 격침시켜야 합니다.

12. 북한의 비대칭전력 중 사이버 공격도 점점 위협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미국 등 선진국은 이미 사이버세계를 제 5의 전장으로 규명하고 있는데요, 우리도 북한과의 사이버전을 염두에 해 둔 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요?

대비를 해야 하는데 야당이 우리의 사이버전 대응 전력을 무력화 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국군사이버사령부, 국정원 등에서 북한의 사이버 공격을 방어하고 반격해야 합니다. 방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격을 해야 적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데, 반격할 수 있는 우리 전력을 야당이 지속적으로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버전의 측면에서는 우리 군의 대비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13. 김정은 시대 북한은 다종 다변화를 통해서 군을 개편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정은 정권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김정은이 정신이 더 이상해지지 않고서야 전쟁을 하려고 마음먹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군이 단독으로 있다면 고려해 볼 수 있겠지만 미군이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로마 군보다 강력한 것이 현재 21세기 미군인데, 그런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한국군을 선제공격 하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싸움준비 완성의 해’, ‘통일대전의 해’, 이런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빈약한 정치기반을 강화시키고 미국이 공격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증폭, 강화시켜 내부적인 단결을 강화하기 위한 북한 국내 정치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통일대담 오늘 이 시간에는 신인균 자주국방 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킨 이유와 현재도 첨예하게 대립중인 남북한의 현실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대표님, 오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