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김정일과 다른 김정은의 ‘공포정치’

북한 김일성은 30년간 끊임없는 숙청을 통해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다. 북한 현대정치사는 김일성과 반김일성 세력 사이의 부단한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1948년 북한정권이 수립된 이후, 북한만의 독특한 수령유일체계가 제도화(1967년)되기까지 김일성은 다른 세력들과의 연합과 대립을 반복하며 권력을 집중시켰다.

당시 북한 지도부에는 크게 4개의 파(소련파, 연안파, 갑산파, 국내파)가 있었는데 이는 노선이나 이념적 차별성이 있는 분파라기보다는 ‘출신성분’에서 비롯된 정서나 경험, 주변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뉘어진 인적 분류에 불과했다. 그 가운데 김일성만이 상대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었을 뿐이었다.

중국과 소련의 공산당으로부터 물적, 이념적 지원을 받고 있던 북한의 노동당이 동북아시아 공산진영의 국제적 변화와 흐름속에서 한쪽으로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은 김일성의 유일독재 지위가 수많은 내적 투쟁을 통해 성공적으로 안착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어차피 북한의 정치체제는 조선노동당 이외의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 단일정당 체제이다. 노동당 내부의 경쟁과 대립은 사실 이념적 대립이 있는 투쟁이라기 보다는 전쟁(6.25)준비, 전후 복구계획 등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의 정책에 관한 것들이었다. 대부분 정책 집행과정에서 야기된 위기와 대응속에서 북한 지도부 내의 권력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현대 정당정치에 관한 세계적 학자 사르토리(G. Sartori)는 다원적 정당체계와 단일 정당체계를 구분하여 단일 정당체계 내에서의 ‘당내 경쟁’은 곧 정당 내 각 분파 정치지도자 간의 직접적 대면 투쟁의 형식을 띤다고 갈파했다. 유권자를 의식한 경쟁적 정당의 부재에서 비롯된 특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일정당 체계에서 당내 권력 갈등은 그 체제 지도부 내부의 권력갈등과 마찬가지라고 해석된다. 북한 정치구조는 바로 당과 국가가 하나의 전체로 인정되는 정당국가 체계(Party-state system)이다. 김일성은 이 단일 정당체제의 최후 승리자인 셈이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북한의 구호는 이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노동당의 당수이자 유일 수령이 곧 국가의 지배자가 되는 정치구조를 정착시키는 일에 북한은 해방 후 20년을 쓴 것이다.

정상적인 보통국가에서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가 발생하면 그것이 곧 전사회적인 저항으로 조직화되거나 정치세력화하여 기존 권력구조를 바꾸든지 지배세력을 교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정치사회적 사건이 지도부의 권력갈등 수준에 머물고 만다. 애초에 노동당 외의 정치세력이 자리잡을 공간이 구조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각 세력들 간의 정책충돌이나 노선대립의 상황을 이미 당 내에서 인정받고 있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리해 나갔다. 북한 지도부 안에서 국가재건과 복구에 관한 노선에 대해 다른 입장과 대안을 내세웠던 분파들이 정책적 충돌을 빚는 사이 김일성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과 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 세력들을 도구화했다고 볼 수 있다.

숙청은 그 방식이었고 그 방법의 잔혹함은 여타 세력에 공포감을 심어주는 정치적 자산이 됐다. 그 과정의 최종 마무리가 1967년 노동당 4기 15차 전원회의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 회의를 계기로 북한 정치권력 내부에서는 김일성의 생각만이 유일한 사상이론으로 자리잡았고 다른 견해는 모두 부정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이런 김일성주의를 이념적으로 완결 짓는 결정판이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이 조선노동당의 유일사상으로 공식화되어 유일지도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김정일은 이를 고스란히 승계하여 ‘유일영도체제’로 강화했고 유일지도사상을 물리적으로 지탱하기 위해 군을 체제 내에서 정치 세력화한 개념이 ‘선군정치’이다.

이처럼 김일성에서 시작돼 김정일에 수립된 ‘혁명적 수령관’, – 즉, 수령은 ‘인민대중의 최고뇌수’이기에 수령을 무조건 받드는 견해와 관점은 절대적이라는 인식-이 3대 김정은에게까지 이어졌다.

후계자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확립하는 일에 당이 매우 중요하다는 북한의 인식은 김정은 등장 후 ‘당에 의한 지배’인 ‘선당’이 회복되어 ‘선군’을 앞섰다는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장성택, 현영철 등 핵심 라인의 무자비한 숙청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피할 수 없던 사건인지도 모른다. 김일성이야 각 분파 사이에서 유일수령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피의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면 그 아들과 손자는 왜 선대의 잔인함을 끊지 못하는가? 잔혹함은 유전학상 필수적으로 물려지는 것인가? 정당 간 경쟁이 없는 단일 정당임에도 그 내부경쟁의 끝은 왜 무자비한 숙청으로 끝나는 것일까?

그것은 공포 자체가 아니라 공포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지도자의 ‘두려움’이 유전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시간이 갈수록 강화된다. 저절로 완화될 수 없다. 두려움의 끝은 비참한 말로이다. 공포는 그런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민주국가에서는 정치와 경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듯 정치와 군대가 분리된다. 군대의 문민통제라는 것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에 의한 통제로 대의된다. 독재국가 북한에서 군은 곧 정치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총정치국장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그런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조선인민군은 수뇌부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작전이 가능한 군대다. 군의 핵심은 오로지 효율이다. 제한된 자원을 갖고 주어진 목표를 최소한의 비용으로 달성하는 것. 군대의 정서가 반대의견과 토론하는 문화와 양립하기란 불가능하다. 북한의 리더십은 군대식 명령체계와 가치가 지배하고 있다.

정치란 ‘가치의 권위적 배분’(D.Easton)이라는 고전적 정의에 비추어도 북한의 정치에는 가치도, 권위도, 배분도 오직 백두혈통만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개념의 부재가 곧 북한 정치의 실체라고 거칠게 압축할 수 있겠다.

안되면 되게 하는 것. 차별화된 군대의 힘이 내부화할 때 반대파는 숙청 외 다른 선택이 사라진다. 군의 숙청 또한 재기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남은 자들이 가질 저항의 의지를 초기에 제거하는 것. 그것은 물리적 힘에 정서적 두려움을 얹은 공포의 모습으로 포장될 수밖에 없다. 

김일성의 공포정치는 성공했다. 김정일은 그 유산을 성공적으로 계승했다.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그 주기마저 매우 짧아졌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방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포정치가 유전될수록 절대권력이 안고 있는 두려움의 크기는 커지고 있다. 공포의 승수효과가 두려움으로 전이되는 걸까? 세계는 북한정치의 결말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