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高手들, ‘제2의 6·15’ 노리며 남조선 시험중

‘데자 뷔(deja vu)’,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한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라는 뜻이다. 현재 한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다. 언제, 어디서 보았을까? 지금 대한민국 정치인과 언론은 황병서 등 3인의 깜짝 방한 쇼, NLL과 휴전선 대북전단 총격, 김정은의 40일 은둔과 재등장, 남북 군사회담과 제2차 고위급 회담 등 일련의 정세 변화에 대해 ‘판’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단발 사건들에 주목하느라 전체 ‘그림’을 못보고 있는 것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대북전단 총격사건을 놓고 “북한을 자극하는 것은 안 좋다”고 한 발언이나, 황병서 등 3인이 평양으로 돌아간 직후 사흘 뒤 NLL에서 총질한 사건을 놓고 “하여튼 북한 놈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라고 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사고방식을, 솔직히 필자는 도대체 이해하기 어렵다.

어찌 해서 뻔히 보이는 북한의 전략이 그렇게도 눈에 안 들어오는가? 이런 일이 이번에 처음도 아니고, 1998년 이후 얼굴만 바꿔가며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온 ‘철지난 그때 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머리는 모자 쓰기 위해 달고 다니는지, 오로지 유권자들에게 표 달라며 꾸벅 절하기 위한 용도인지… 이들의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는지 정말 궁금할 뿐이다.
  
간단히 말하자.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북한의 대남전략은 또다시 한국 정부의 뒤통수를 쳐서 ‘제2의 6.15’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다만, 총감독과 연출, 각본, 주연·조연배우들이 바뀌었을 뿐, 이야기의 구성(plot)과 줄거리(story telling)는 1998년~2000년 6월과 거의 유사하다. 

1990년대 초 공산권이 붕괴되고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경제가 몰락하고 94~98년 300만 명이 굶어죽었다. 이 시기 김정일은 나라의 문을 닫고 국내적으로는 극단적인 공포정치로 체제를 다잡고, 대외적으로는 대포동 미사일 발사(98년)를 비롯하여 “우리를 건드리면 한반도에 전쟁 난다”는 시그널을 보내며 선군노선으로 위기를 돌파하였다.

김정일은 핵개발을 매개로 한반도에 군사긴장을 일으키고, 이를 매개로 양자·다자 국제협상을 만들고, 경제지원을 얻어내어, 다시 핵 업그레이드를 하고, 협상을 하고, 경제지원을 타내면서 김정일식 핵-경제 병진노선으로 자신의 수령독재체제를 유지하였다.

이 시기 김정일의 선군노선 체제 생존전략에 최고의 도우미가 누구였던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었다. 김정일은 1998년부터 길게는 2년 가까이 남조선의 햇볕정책을 시험한다. 햇볕정책이 공화국을 녹여먹으려는 것(와해전략)인지, 깨물어 먹으려는 것(군사전략)인지, 이리저리 찔러보며 시험에 들어간다. 1차 서해교전(99년 6월)을 일으키고, 민간상선을 위장한 선박이 제주해협 통과를 시도하고, 서해 NLL 신통항질서를 발표하면서, ‘DJ의 음흉한 속심’을 다각도로 시험한다.

1차 서해교전에서 대한민국 해군이 승리하자 김정일은 김대중 정부에 엄청난 비난을 퍼붓고 남북관계 파탄과 전쟁 운운하면서, 끝내 DJ 정부로 하여금 “선제 발포하지 말라”며 아군의 손발을 묶는, 세계 전사(戰史)에 유례가 없는 괴상한 ‘교전수칙’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윤허’해줄 때까지 많은 것을 요구하였다. 현금 4억 5천만 달러가 송금되었고, 중국·러시아-북한의 국경지역에 있던 한국 정보원들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김정일은 또 남북정상회담 물밑 작업을 베이징에서 하는 조건을 내걸어, 중국이 남북정상회담의 ‘매파’역을 담당하도록 역할을 주면서, 중국으로부터도 경제지원을 받아냈다. 그리고 2000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6.15남북공동선언까지 달려갔다.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내외 고립에서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김정일이 김대중 대통령을 평양으로 ‘불러 올린’ 모양새를 취하여 북한 주민들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 이용하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한 승용차를 타고 순안공항에서 백화원초대소로 가는 동안 연도에 선 북한 주민들이 “결사옹위”를 외쳤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후 KBS 일요스페셜에 출연하여 “손님을 불러놓고 왜 자기네들끼리 ‘결사옹위’를 외치는지 의아했다”라고 말했다. 김정일의 북한식 수령주의를 DJ가 알 턱이 없었다. 김정일이 DJ를 철저히 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DJ는 자신이 김정일보다 ‘한 수 위’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이후 김정일은 김대중 정부를 상대로 경제지원을 받아내는 한편, 외교 고립에서 탈출하였다. 국제관계에서 볼 때, 북한의 제 1당사자인 대한민국이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하고 화해 분위기로 나가니까, 동맹국·우방국들인 미국·일본·유럽국가들은 북한과 자연스럽게 화해협력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반도 안정’이 중요한 중국은 남북 화해 분위기가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에 ‘무조건 지지’였고…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의 지원에 힘입어 유럽·동남아 국가들과 외교관계에서 속도전을 벌여 인권을 중시하는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교·복교(復交)에 성공하였다.

이상과 같은 한반도 정세의 흐름이 1998~2001년까지 이어지다가, 9·11 테러사건(2001. 9.)과 북한이 몰래 고농축우라늄 핵개발을 하다가 미국에 들키면서(2002. 10.) ‘김-김 협력’도 질척거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노무현·이명박 정부 시기 한-미-북-중 간의 갈등과 협력은 생략하자.

그러면, 지금 김정은이 처한 상황은 어떤가?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고 지금 김정은이 처한 상황도 여전히 고립무원이다. 장거리 미사일 발사, 3차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제재는 더 촘촘해졌다. 중국의 시진핑은 김정은을 만나주지 않는다. 미국의 오바마는 중동문제(이라크·리비아·시리아)와 러시아의 징그러운 푸틴 때문에 북한에 신경 쓸 겨를도 없다. 북한 문제는 중국과 한국에게 던져놓은 상태다.

김정은이 체제를 유지할 방법도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핵-경제 병진노선밖에 없다. 문제는, 북한의 경제 사정이 2009년 11월 화폐개혁 시점부터 ‘시장논리’ 쪽으로 넘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13개 경제특구와 새 6개 특구를 성공시키려면 경제 개방을 해서 외자 유치를 받아야 한다.

지금 김정은이 개방하려고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핵을 포기할 수는 없다. 또 하나, 지금 김정은을 국제적으로 포위하고 있는 것은 김일성·김정일이 남겨준 거대한 유산, ‘북한인권문제’이다. 핵문제와 북한인권 문제는 세계적 판도에서 객관화된 두 가지 북한 문제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유럽·미국·한국·일본·캐나다·호주 등지에서 전개해온 민간분야의 북한인권운동이 15년이 지나면서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거의 항구적인 북한 아젠다로 자리잡아 김정은 정권을 포위해가고 있다.

지난 9월 제69차 유엔총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북한인권 문제를 주제로 각국 장관급으로 구성된 고위급 회의가 열렸다. 케리 미 국무장관은 “북한 정치범수용소은 즉시 폐쇄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윤병세 장관은 “남북 간 인권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북한인권 문제를 거론했다. 중국의 탈북자 북송반대의 뜻도 에둘러서 언급했다.

그리고 며칠 뒤 유럽연합은 김정은 지도부를 국제형사재판소에 세우는 안을 40개 회원국들에게 회람시켰다. 그러나 리수용 외무상과 유엔주재 북한대사관의 ‘조선인권문제 보고서’에 귀를 기울이는 나라는 없었다.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세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유럽연합이 유엔 안보리로 하여금 북한지도부를 국제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안(案)을 내놓는 것 자체가, 국제사회에서 ‘김정은의 지위’를 객관화시켜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유럽연합이 그 안을 내놓으면 세계적 판도에서 김정은은 ‘객관적으로’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의 이미지와 동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어느날 자고 일어나니 밀로셰비치와 같은 ‘인간 말종’이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중국·러시아가 김정은 지도부를 국제법정에 소추하는 것은 물론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러시아가 자국의 국익으로 간주하면서 북한인권 문제를 놓고 미국·영국·프랑스 및 다른 안보리 이사국과 얼굴 붉히며 싸우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러시아는 이 문제를 되도록 ‘회피’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 김정은이 체제생존을 하려면 1998~2000년 시기의 김정일이 김대중 대통령을 이용하여 경제지원을 받고 외교 고립에서 탈출한 것처럼, 박근혜 정부를 이용하여 국제고립에서의 탈출과 19개 경제특구 외자 유치, 그리고 핵개발 업그레이드를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를 넘으며 남북 정상회담이 먼저 되어야 중국 시진핑, 미국 오바마와도 통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는 1998~2000년 그 시기의 틀(frame)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자 뷔’이다.

김정은이 장기간 잠적한 배경이 건강상의 이유가 맞는 것 같다. 무릎인지, 발목인지 수술한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심혈관계 전문의인 독일 의사가 방북한 것도 팩트인 것 같다.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김일성 이미지 차용 정치 프로파간다를 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이 그것으로 설명이 충분할까? 아닌 것 같다. 최근의 상황은 매우 불리해진 수령의 대내외 이미지를 북한 특유의 능란한 선전선동으로 탈출하고, 향후 전개될 남북 간 협상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틀 안으로 잡아채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과거 김정일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나 9·11 테러 시기처럼 국제환경이 자신에게 불리해질 때는 40일 넘게 철봉각 또는 자모산 별장에서 잠적을 감췄다. 대외적으로 나타나면 후세인과 이미지가 겹치면서 독재자로서 언론의 표적이나 되고 득될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건강상 이유로 잠적하였다. 잠적하는 동안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중병설, 실각설이 돌기 시작하였다. 이때 황병서 등 3인이 10월 4일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깜짝쇼로 참가하였다. 국내외 언론들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포커스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9월 유엔총회에서 김정은 지도부의 국제형사재판소 회부 문제와 건강상의 김정은 관련 나쁜 뉴스가 일시에 사라지고 황병서 등 3인의 깜짝 방문으로 한반도 정세의 국면이 바뀌어 버렸다. 남북 간 2차고위급 회담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장면은 과연 앞으로 남북한이 화해협력으로 갈 것인가로 언론의 포커스가 바뀐다.

이것은 그동안 남북간에 물밑 협상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그 스타일로 미루어 보아 북한 중앙당의 대남대외 전술의 고수(高手)들의 작품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갑작스럽게 판을 바꾸는 것. 그것은 늘 북한이 먼저 해왔다. 남북관계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놓치는 것을 북한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주도권 장악이 사활적이다.

황병서 등 3인이 다녀간 이후 북한은 서해 NLL에 의도적으로 월선하여 한국 해군의 반응을 타진하였다. 그리고 대북전단 풍선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그리고 제2차 고위급 회담을 걸고 어름장을 놨다. 지금 북한은 박근혜 정부를 길들이면서, 앞으로 있을, 질척거리면 길게 갈 남북협상을 북쪽에 유리한 결론으로 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늘 ‘종신직 수령’ 북한에 유리하고 임기 5년내 한건 해야 하는 남한에 불리한 것이다. 지금 북한은 군을 먼저 내보내서 남한의 협상 태도와 속심을 알아내고, 2차 고위급 협상의 틀을 유리하게 만들어갈 것이다.

(북한이 협상을 잘 하다가 갑자기 서해에서 총질을 하면 그것이 남남갈등 유발과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전술인지도 모르고, 또 남한내에서 ‘북한놈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라는 멍청한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나올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늘 당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길들이기는 오늘 아침(15일) 군사회담 대표로 나온 김영철 정찰총국장에서 발견된다. 김영철은 남한과 합의를 할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를 괴롭히고 두들겨 패는 역할이다. 이 길들이기는 생각보다 오래 갈 수도 있다. 임기가 있는 박근혜 대통령 측에서 힘이 빠져서 먼저 합의를 안달할 시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김정은 정권이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은 6·15의 부활 내지 제2의 6·15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제2의 6·15’에는 평화협정, 연방제안이 등장할 수도 있다.

앞으로 남북 협상은 누가 이길 것인가? 알 수 없다. 다만 향후 전개될 남북협상과 변화될 한반도 정세를 종합적으로 기획·조정할 북한의 대남대외 라인과 우리측 주요 인물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남측: 박근혜 김관진 김규현 윤병세 류길재 이병기 최윤희 주철기 外
북측: 김정은 조연준 황병서 김양건 최룡해 김영철 강석주 김계관 김영일 外

우선은,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공세를 잘 방어해내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판단한다. 공격은 그 다음이다. 높은 수준의 전략가가 참 아쉬운 시기인 것 같다.